사암(思菴) 박순(朴淳)

思菴(사암) 영정

字는 화숙(和叔), 號는 사암(思菴),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청백리에 녹선. 상(祥)의 조카이며 우(祐)의 아들. 1523년(중종18년) 나주 태생. 14살때까지 부친 육봉선생(六峰先生) 박우(-祐)에게서 배우고, 15세에 화담 서경덕의 문인(門人)으로 들어갔다. 화담 학풍에 영향을 받은 그는 평생을 두고 책과 실제를 병행하여 연구하고 또한 어디에 얽매이거나 구애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나중에 원로가 되어서도 아직 새파란 신진(新進)들이었던 율곡 이이(李珥)나 성혼(成渾)과도 스스럼없이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9년(명종 4년) 26세가 된 그는 현재 대전광역시 문지동에 있는 시조묘 아래에 서실을 지어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원근의 학자들이 사암선생(思菴先生)이라 일컬었다. 그는 화담에만 갇히지 않고 이기이원론(주리론)을 기초로한 정통 주자학의 교조 퇴계 이황이나 실천 유학자 남명 조식으로부터도 사사(師事) 받으며 폭을 넓혀갔다. 1553년(명종 8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 갑과(甲科)에 장원급제 후, 1556년(명종 11년)에는 부마(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고, 1561년(명종 16년)에는 훈구파 임백령(林百齡)의 공훈을 폄하해 궐문 밖으로 쫓겨나기도 하는 등, 훈구공신들에 맞서 사림 운동에 전력투구하여 조선 정치의 물줄기를 사림 쪽으로 이끌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고, 1570년(선조 3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홍문관 대제학 (弘文館 大提學)에 올랐다. 사실 박순은 명종 때 이미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됐었는데 얄궂게도 스승인 퇴계 이황이 당시 그 아랫자리인 제학이었다. 대학자를 제치고 대제학에 오르는 법은 없다며 박순은 어명을 고사하고 퇴계에게 양보했다. 당시 퇴계는 66세, 사암은 44세였다. 사암의 사양에도 퇴계 역시 대제학 자리를 고사하고 다시 박순에게 미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미담으로 역사에 기억됐다.

1572년(선조 5년)에 우의정(右議政), 이듬해인 1573년에 좌의정(左議政), 1579년(선조 12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사암은 14년간 삼정승을 두루 장기 재임하면서 봉직하다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옹호, 서인(西人)으로 몰려 탄핵받고 정상의 자리에서 하야(下野)해야 했다. 당시 율곡은 자기 스승 휴암 백인걸의 사람됨과 학문을 어찌보느냐는 선조의 물음에 '기고학황(氣高學荒)'이라 당돌하게 말하는 등, 젊은 나이에다가 말을 꾸밀 줄 모르는 그의 태도는 대다수의 선비들을 등돌리게 만들었다. 14년 동안 삼정승을 지낸 그가 대부분의 당시 사림(士林)은 물론,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조차 적으로 돌릴지도 모르는 데도 율곡(栗谷)과 우계(牛溪)의 진심을 변호한 것은 극단에 치우지는 것을 싫어하는 공의 천성과 사림(士林) 운동이란 큰 틀을 염두에 둔 대국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문수학했던 절친 초당 허엽(草堂 許曄)과 공이 가장 아꼈던 제자 정개청(鄭介淸)마저 그에게 등을 돌려 동인(東人) 편에 섰다.

사암은 서화담의 문인인 동시에 퇴계의 문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서인의 당파로 몰려 사방에서 공격받는 것은 부당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사암공의 하야(下野)는 단순히 <기호학파의 서인>과 <퇴계, 남명학파, 화담학파의 동인>간의 동서 대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마간 정승 자리에서 붕당간의 대립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사림의 결속을 다지려 했던 그는, 분쟁이 점차 원로 사림과 신진 사림 간의 대립, 이른바 노소당(老小黨)의 대립으로 불이 옮겨 붙자 스스로 하야(下野)했다. 조광조의 유교 근본주의 운동에 매료된 후배 신진 사림들은 유교를 단순히 배운 자들의 이념에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 백성 전체의 실천강령으로서 만들기 위해 사암 같은 1세대 사림들과 스탠스를 달리했다. 게다가 훈구공신들과 임금의 정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타협적 자세였던 원로 선배 사림들의 자세는 공박(攻駁)의 대상이었다. 애제자 정개청의 변절도 이런 흐름 때문이었다. 사림 정치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그가 후배 신진 사림들에게 떠밀려 중앙 정치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그는 허엽(許曄)같은 편협한 여타 원로들과 달리 젊은 사림들의 뜻과 의지를 꺾지 않고 지켜줄 줄 아는 대국적인 견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문형(文衡)으로서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을 철저히 배격, 정통 주자학을 관철했다는 점에서 기호학파에 가까운 유교적 이념성을 지키며 치우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화담, 이황, 동시에 남명 조식의 문인이었으면서도 후세 서인(西人)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등에게도 계속 존경을 받고 사상이나 작품등이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사암은 노장 사상에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던 서화담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다) 사암공은 조선 정치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붕당 정치의 서막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위치에서 내려와, 경기도 포천 백운산에 배견와(拜鵑窩-초가집)와 이양정(二養亭)을 지어 여생을 보내고 오래지 않아 향년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 퇴계 이황이 그를 묘사하길 '그는 한 덩이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그를 대하면 정신이 갑자기 시원해짐을 느낀다'고 하였다.

그의 풍신(風神)이 시원하고 명랑하며 맑고 밝으면서도 항상 몸가짐이 조용하고 경서(經書)의 깊은 뜻을 해석하여 응대함이 정민하기로 정평이 있었는데 명종도 이르길 '그는 송죽(松筠)같은 절조(節操)와 지조(志操)가 있고 수월(水月)같은 정신(精神)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명나라 신종(神宗) 연간인 1572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가서 당시까지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던 외국의 사신들을 당당히 정문으로 드나들도록 주청해 개선하였던 이야기와 송설체(松雪體-원나라 조맹부의 서체, 왕희지의 글씨가 주종을 이룸. 우측 사진)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