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 및 성씨유래




忠州朴氏(충주박씨)는

신라 제54대 景明王(경명왕)의 다섯째 아들 彦昌(언창)[沙伐大君(사벌대군)]의 후손 朴英(박영)이 고려시대에 副正(부정)의 벼슬길에 오르면서 후손들이“영”을 충주박씨 貫祖(관조)로 모시고 世系(세계)를 이루고 있다.

충주박씨의 확실한 계보는 성종5년 갑오년(서기 1474년)에 僉正(첨정) 朴原昌(박원창)이 처음으로 修譜(수보)하였다.

첨정 박원창의 成化譜(성화보) 이래 辛卯(신묘), 甲戌筆譜(갑술필보), 前甲申(전갑신), 後甲申(후갑신), 庚辰(경진)의 세보를 編纂(편찬)하였다. 그후 1972년(임자)에 參議公(참의공) 파보를 하였는데 보다 충실한 보다 나은 족보 편찬의 노력으로 “副正公(부정공) 시조를 始祖王始祖(시조왕시조)로 하고 準尙州朴氏譜諜(준상주박씨보첩)하여 沙伐王子(사벌왕자) 諱昱(휘욱)이오 其子下七代失諱後(기자하칠대실휘후)에 八傳而有諱甄(팔전이유휘견)이오 九傳而有諱元挺(구전이유휘원정) 十傳而有諱英(십전이유휘영)으로 교정하여 昭穆(소목)을 辨證(변증)하고 委員會(위원회)에 붙여 合議一致(합의일치) 되었으므로 不顧贊越(불고찬월)하고 위와같이 변증하니 두려워 마지 않는다”라고 한 선계의 그릇된 考察(고찰)로 간주하는 다소의 혼돈을 야기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충주박씨의 선조 박원창이 우리나라 족보사상 처음으로 수보한 성화보에 따라 英(영)을 관조로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 후 영의 아들 臣(신)이 고려 때 檢校神虎衛大將軍(검교신호위대장군)을 지냈으며 손자 元崇(원숭)은 三司右使(삼사우사)를 歷任(역임)하고 僉議評理(첨의평리)를 지낸 아들 得升(득승)과 함께 家勢(가세)를 일으켰다. 고려말에 와서는 權臣(권신) 林堅味(임견미)의 횡포를 탄핵했던 8세손 光理(광리)가 開城少尹(개성소윤)을 역임, 司僕寺正(사복사정)에 贈職(증직)되었다.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을 거쳐 鎭海(진해) 稷山(직산) 監務(감무)를 지냈던 蓁(진)과 殷山郡事(은산군사)를 역임한 蘇兄弟(소형제)가 어지러운 政局(정국)을 피하여 충청도 덕진현 가장골로 隱居(은거)하여 살게 되어 이로서 충주박씨의 世居地(세거지)를 이루게 되었고, 道洞(도동)의 追遠祠(추원사)에는 관조와 이하 7세의 位牌(위패)를 모시고 있다.

8세의 묘소는 개성 동문밖에 모셨는데 불행히 확인할 수 없어 恨歎(한탄)스러운 일이지만 그곳에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관조 영의 9세손 參議公(참의공)이 4형제를 두니 孝諴(효함), 忠諴(충함), 悌諴(제함), 信諴(신함)으로 그 후손들이 大田一圓(대전일원), 堤川(제천), 永同一圓(영동일원), 群山(군산), 連山(연산), 公州(공주), 恩津(은진), 長水(장수), 龍安(용안), 廬山(여산), 羅州(나주), 始興(시흥), 龍仁(용인), 洪城(홍성), 錦山(금산), 淸州(청주), 開城(개성), 光州(광주) 등지에 集城村(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동생 判書公(판서공)이 5형제를 두니 仁興(인흥), 義興(의흥), 禮興(예흥), 智興(지흥). 信興(신흥)이며 그 후손들은 懷德(회덕), 洪原(홍원), 淸津(청진), 孟山(맹산), 光州(광주), 松亭(송정), 羅州(나주), 高敞(고창), 古阜(고부), 寶城(보성)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충주박씨는 家傳忠孝(가전충효) 世守敦睦(세수돈목)의 가훈을 600여년 간 지켜오면서 道學文章(도학문장)과 忠孝節義(충효절의)를 대대로 배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