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訥齋) 박상(朴祥)

訥齋(눌재) 영정

박상의 字는 昌世(창세)이고 호는 訥齋(눌재),
시호는 文簡博聞多見正直無邪(문간박문다견정직무사)다.


본관은 忠州(충주)로 進士 智興(진사 지흥)의 차자다.
1474[成宗甲午(성종갑오)]년에 출생하였다. 丙辰(병진)년에 進士(진사)하였고 辛酉(신유)년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校書館正字(교서관정자)를 지냈고, 中宗初(중종초)에 司諫院(사간원) 獻納(헌납)이 되어 憲府(헌부)와 더불어 척리의 급한 발탁을 반대하였고 諫官(간관)으로 직책을 일관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처 臨陂縣令(임피현령)으로 3년간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날마다 독서로 취미를 즐기다가 辛未(신미)년에 弘文館(홍문관) 修撰(수찬) 校理應敎(교리응교)로 潭陽府使(담양부사)가 되었다. 乙亥(을해)년 봄에 章敬王后(장경왕후) 上賓問題(상빈문제)로 바른말 하는 자가 없었는데 淳昌郡守(순창군수) 金淨(김정)과 함께 前王后愼氏(전왕후신씨)를 復位(복위)시키려고 三勳臣(삼훈신)들이 君父(군부)를 억제하고 國母(국모)를 축출한 죄를 밝히려한다고 상소하였다. 中宗(중종)께서 이 말을 듣고 진노하였으며 權民守(권민수) 李荇(이행) 등이 처형하라고 하는 것을 大臣 鄭光弼(정광필) 吏曹判書(이조판서) 安塘(안당) 등의 주선으로 모면되고 南平(남평) 烏林驛(오림역)으로 귀양보냈다. 丙子(병자)년에 큰 한재가 나서 인심이 소란하니 석방시켰다.

시골로 가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가 儀賓都使(의빈도사)를 재수 받았고 여러 벼슬을 거처 繕工監役(선공감역)이 되었다. 己卯(기묘)년에 士禍(사화)가 일어나자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 친척과 제자들이 모두 다 만류해서 상소문을 불태웠다. 그 후 내직에 있기를 싫어하여 辛巳(신사)년에 尙州牧使(상주목사) 忠州牧使(충주목사)에 재수되어 삼 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조정에서 물러나와있던 金世弼(김세필), 金安國(김안국), 李耔(이자), 李延慶(이연경)등과 같이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후진들에게 절의의 역사관을 심어주기위해 東國史略(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김시습의 의리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으로 시문을 모아 梅月堂集(매월당집) 간행의 기초를 닦았다. 다시 司導寺(사도사) 副正(부정)을 배수하였고 丙戌(병술)년 重試(중시)에 장원급제하여 通政(통정)으로 올라 羅州牧使(나주목사)를 배수하였다. 己丑(기축)년에 시골로 돌아가 사람들의 왕래를 사절하고 병으로 날마다 의약을 일삼다가 향년 57세로 집에서 졸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하였고 커가면서 강직하여 몸가짐이 정숙하고 청렴결백하여 아부하고 모함하며 시기하고 탐욕내는 무리를 볼 때는 糞土(분토)와 같이 여겼고 충언과 곧은 기운이 秋霜(추상)같았고 여러번 변을 당했어도 위엄이 꺾이지 않았으니 李退溪(이퇴계)가 그 고상한 기품과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元祐(원우)의 完人(완인)이라고 하였다.

뒤에 학행으로 資憲大夫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자헌대부이조판서겸양관대제학)를 贈職(증직)하였고 시호를 文簡博聞多見正直無邪(문간박문다견정직무사)라고 贈諡(증시)하였다.